유통
시칠리의 대표 와인 이름은 왜 '도망친 여인'일까 [와인 인문학]
- 와인 한 병에 담긴 역사와 전설
시공간 초월 특별한 경험 선사

도망친 여인, 돈나푸가타 와이너리
시칠리의 와인 명가 돈나푸가타는 아름다운 와인 라벨과 부드럽고 풍부한 향으로 인기가 높다. 와인 이름에 얽힌 이야기 또한 흥미를 끈다. 돈나푸가타는 ‘도망친 여인’이란 뜻이다.
가장 대표적인 레드 와인 앙겔리(Angheli)의 라벨에는 아름다운 여인이 금발머리를 휘날리며 달밤에 어딘가로 말을 타고 떠나는 모습이 담겨있다. 그림 속의 여인은 19세기초 나폴리와 시칠리를 함께 통치했던 여왕 마리아 카롤리나(Maria Carolina)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군대가 나폴리를 침공해오자 황급히 시칠리아로 피신하게 되는데, 라벨은 이런 역사의 한 장면을 담고 있다.
시칠리 사람들은 마리아 카롤리나를 사랑했고 불행한 삶을 살았던 그녀를 추억하며 이 지역을 돈나푸가타로 부르게 됐는데, 170년의 오랜 양조 역사를 지니고 5대째 포도 농사를 지어온 시칠리의 랄로 가문이 와이너리의 이름을 돈나푸가타로 짓게 된 것이다.
마리아 카롤리나는 유명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황녀 마리아 테레지아의 5남 11녀 중 10번째 딸이었다. 여동생은 프랑스 루이 16세의 부인 마리 앙투아네트였다. 그녀는 프랑스 혁명 때 루이 16세와 함께 단두대에서 처형을 당하게 된다. 동생의 죽음에 격분한 언니 마리아 카롤리나는 프랑스에 반대하는 정책을 펼쳐 오다가 결국 왕위를 뺏기고, 나폴레옹 군대에 쫓겨 시칠리로 피신하게 된 것이다. 종국에는 프랑스의 압력으로 남편 페르디난드 4세에게도 버림을 받고 시칠리에서도 쫓겨나 고향인 오스트리아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시칠리는 1860년 이태리 반도 통일 전까지는 이태리와는 다른 역사를 갖고 있었다. 기원전 8세기경부터 페니키아와 카르타고인들의 지배로부터 시작해 ▲그리스 ▲로마 ▲반달족 ▲동고트족 ▲비잔틴 ▲아랍 ▲노르만 ▲아라곤 ▲스페인 ▲오스트리아와 영국의 지배가 이어져 그야말로 외세에 의한 수난의 역사를 이어왔다.
시칠리에는 지금도 다양한 문화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리스식 신전과 모스크를 개조한 성당, 아랍스타일의 크리스천 벽화, 노르만풍 기둥머리 장식 등 시칠리는 다채로운 문화의 산물로 가득하다.

이태리를 대표하는 와인 키안티 클라시코 생산지의 가운데에 자리잡은 베라짜노 와이너리(Castello di Verrazzano)는 이태리 반도가 통일되기 이전 강력한 도시 국가로 서로 경쟁하던 피렌체와 시에나 사이의 무역을 통제하기 위해 그레베(Greve) 계곡 위에 세워져 감시 탑 역할을 한 곳이다. 후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물로 지어졌고 아름다운 르네상스식 정원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고성은 7세기경부터 베라짜노 가문의 소유였는데 흥미롭게도 ‘베라짜노’(Verrazzano)는 라틴어 ‘멧돼지’(Verres)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멧돼지의 땅’을 뜻한다. 이름처럼 베라짜노에는 멧돼지를 방목하는 우거진 숲이 있고, 방문객들은 여기서 키운 멧돼지 구이에 베라짜노 와인 한잔하는 것을 최고의 즐거움으로 꼽는다.
베라짜노 가문이 유명해진 것은 후손 중 한명인 지오반니 다 베라짜노(Giovanni da Verrazzano)가 프랑스 왕 프랑수와 1세의 요청으로 신대륙 항로 개척에 나서게 됐고, 범선으로 대서양을 횡단한 그는 1524년 4월경 뉴욕 항을 발견하는 업적을 남기면서다.
500년전에 작은 배에 목숨을 걸고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고 뉴욕을 발견한 위대한 항해가였던 베라짜노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 뉴욕 사람들은 1964년에 완공된 새로운 다리의 이름을 베라짜노 다리라 불렀다. 이 다리는 스테이튼 아일랜드(Staten Island)와 브루클린(Brooklyn)을 연결하며 뉴욕을 상징하는 다리 중 하나가 됐다.
다리의 완공을 앞둔 1963년에 이태리 베라짜노 와이너리에서 벽돌 3개를 가져와 베라짜노 다리 입구에 심어 넣었고, 같은 날 베라짜노 다리에서 3개의 벽돌을 가져가 와이너리 건물 전면을 장식함으로써 두개의 건축물에 동질성을 부여하게 됐다.
뉴욕 사람들은 이태리 키안티 지역을 방문하면 꼭 베라짜노 와이너리를 방문한다. 뉴욕을 발견해준 베라짜노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일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3차 원정 기간 중에 식인종들에게 잡혀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위대한 탐험가이자 항해가의 최후라 하기엔 허망하다는 느낌이 든다.
이처럼 와인 한병에는 역사와 전설, 레이블의 디자인에 영감을 준 사건 등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 모든 요소들이 와인의 매력을 더해주고 우리의 경험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준다. 와인에 얽힌 이야기를 이해하는 것은 단순한 음료를 넘어, 한 잔의 와인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특별한 여행을 경험하는 것과 같다.
김욱성 와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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