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녹취공화국, 신뢰를 지우다…감시·처벌 vs 예방·책임 [이근면의 시사라떼]
- 신뢰의 붕괴…불신이 가져온 사회적 비용
감시 방패 버리고 신뢰란 투자 택해야

[이근면 사람들연구소 이사장] 내각에 관한 인사청문회 1차전이 끝났다. 청문회를 거치지 않는 인사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뉴스가 난무한다. 한 개개인이 살아온 길에 대해서 현미경을 들이대고 오늘의 잣대로 과거를 해부한다. 흠결과 흠집에 대해 과연 누가 ‘죄 없는 자, 이 여자를 돌로 치라’는 말처럼 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공직에 대한 눈높이는 엄격함이 맞다. 국민의 눈엔 정치 엘리트들에 대해서 ‘너는 달라?’ ‘다 같다’가 일반적인 평가다. 이제 한국 사회는 바람직한 사회문화를 갖고 있는지, 예방문화인지 감시문화인지를 따져야 할 때다. 사회적 건강도의 물꼬를 신중히 고민해 볼 때이고 한국 사회는 또다시 전환점에 섰다.
언젠가부터 대한민국은 ‘녹취’가 일상이 된 사회가 되었다. 과거에는 기업이나 공공기관 콜센터에서나 등장하던 “이 통화는 녹음됩니다”라는 문구가 이제는 민간 대화·정치 담화·공무원 조직 안에서도 예외 없이 적용되는 현실이다.
특히 지난 정권 교체 이후 ‘적폐청산’이라는 명분 아래 전 정권의 발언과 지시 사항이 하나하나 녹취, 기록되어 공개되는 일이 이어지면서 공직사회 전반에 ‘책임 회피형 행정 문화’가 자리잡았다. 고위 관료는 말조차 아끼고, 중간 간부는 상사의 지시를 녹음하고, 실무자는 ‘보고서로만 말한다’는 행정 관료사회의 침묵과 방어 문화가 굳어져 버린 것이다.
그런가 하면 민간 영역에서도 정치인의 사적 대화·지시 녹음·사무실 대화 등 비공식적 녹취록들이 언론을 통해 폭로되며 사회적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일이 반복된다. 국민들은 사실보다 ‘톤’과 ‘단어’에 휘둘리고, 사회적 판단은 법이 아니라 유튜브 조회수로 이루어진다. 녹취는 진실을 드러내기보다 여론전을 위한 무기로 쓰이고, 개인 간 신뢰는 침묵이나 방어기제로 바뀐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이러한 사회가 ‘개인정보 보호’에는 세계 최고 수준의 법률과 규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든 서비스에 실명 인증이 필요하고, 주민등록번호와 전화번호, IP 주소까지 보호의 대상이다. 그렇지만 정작 대화나 인간관계의 가장 핵심인 ‘신뢰’는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사회가 지금의 대한민국이다.
신뢰의 붕괴, 사회 전체를 위기로 몰아넣다
이런 녹취 중심 사회는 단순한 법적 수단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기본적인 ‘신뢰 자본’(Social Capital)이 붕괴되었음을 상징한다. 신뢰 자본이란 구성원 간 약속과 책임, 협력에 기반한 무형의 자산이다. 이는 조직과 국가 전체의 생산성과 공동체 정신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다.
신뢰가 사라지면 모든 것은 계약과 감시, 통제로 바뀐다. 사람은 먼저 의심받고 이후에야 신뢰를 얻는다. 그래서 보고서는 길어지고, 녹취는 많아지고, 의사결정은 느려진다. 이처럼 '말 한마디'가 폭탄이 될 수 있는 사회에서는 누구도 자유롭고 창의적으로 행동할 수 없다.
정치권은 물론이고 학교·기업·병원·공공기관까지 전 영역에서 이러한 ‘책임 회피형 녹취 문화’가 확산되면 결국 신뢰를 전제로 움직이는 조직은 죽는다. 진짜로 중요한 것은 ‘누가 무슨 말을 했느냐’가 아니라 ‘어떤 문제를 어떻게 신뢰하고 해결했느냐’인데 우리 사회는 이 핵심을 놓치고 있다.

감시 사회 경제적·문화적 비용 어마어마해
신뢰가 무너진 사회는 필연적으로 거래 비용(transaction cost)이 늘어난다. 계약을 더 복잡하게 쓰고, 규칙을 촘촘히 만들며, 이를 확인하는 감시인력을 둬야 한다. 이는 단순한 비용을 넘어 사회적 피로감을 유발하고, 결국 기업의 민첩성과 혁신성 그리고 국가 경쟁력까지 저하시킨다.
또한 인간관계는 점점 피상적으로 변한다. 진심보다는 기록이 우선시되고, 대화보다는 문자로, 회의보다는 이메일로 ‘남는 말’만 주고받는다. 이처럼 '사람 사이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사회는 삭막해지고, 공동체 의식은 사라진다.
이제 우리는 이 흐름을 바꾸어야 할 시점에 있다. 감시가 아닌 신뢰를 기반으로 한 사회문화로의 전환 없이 대한민국은 조직도 경제도 인간관계도 모두 마모된 사회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첫째, 공공기관과 기업부터 녹취 남용 관행을 개선해야 한다. 상담품질이나 업무 보존이 필요한 경우에 한해 최소화된 범위에서만 녹취를 허용하고, 일반적인 대화와 비정형 커뮤니케이션에는 자발성과 책임감 있는 대화를 유도하는 문화로 전환해야 한다.
둘째, 신속하고 공정한 분쟁 해결 시스템을 구축해 녹취가 유일한 방어수단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법원 ▲중재기구 ▲소비자보호원 등 제3자 기관이 신뢰할 수 있는 판단과 조정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국민은 사적 폭로와 녹음 대신 제도를 통한 구제를 신뢰하게 된다.
셋째, ‘신뢰 회복’에 앞장설 리더십이 필요하다. 고위 공직자·정치인·기업 CEO부터 상대방의 말을 믿고, 약속을 지키며, 불리한 내용이 있어도 해명하고 수습하는 신뢰 기반의 리더십 행동을 실천해야 한다. 이것은 아래가 아니라 위에서부터 가능하다.
넷째, 교육과 미디어도 함께 바뀌어야 한다. 어린 시절부터 의심보다는 신뢰, 책임보다는 양심을 강조하는 인성교육이 필요하다. 언론도 ‘녹취 폭로’에만 집착하지 말고 문제의 구조와 해결을 다루는 보도문화로 나아가야 한다.
다시, 신뢰를 말하자
지금 우리는 서로를 너무 잘 감시하고 있지만 너무 쉽게 믿지 못하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개인은 고립되고, 조직은 경직되며, 국가 경쟁력은 정체된다. 결국 신뢰는 비용이 아니라 투자이고 감시는 방패가 아니라 불신의 증거다.
이제 녹취와 감시의 문화에서 벗어나 다시 신뢰와 존중의 문화를 회복해야 한다. 말은 기록으로 남기기보다 사람의 기억과 약속 속에 남아야 의미가 있다. 감시가 아닌 신뢰로 사회를 지탱하자.
개인적 가치의 제1덕목은 자유이고 자율이며 벗어나야 할 첫 번째는 감시와 통제이다. 그것이 ▲건강한 공동체 ▲성숙한 민주주의 ▲따뜻한 나라로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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